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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소리 향기날리고(전주 한옥마을 수채화 작품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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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사동 한일관 골목(35.5x39.1cm 종이에수채 2009)
1962년 초등학교 2학년 때 전주로 이사 온 이래 지금까지 47년을 전주에 살고 있으니 전주는 누가 뭐래도 나의 고향이다. 중학교 다닐 무렵 학교가 일찍 끝나는 날이면 경기전과 전동성당을 돌아 교동 골목들을 누비다가 오목대며 중바위를 오르내리고 남고산성에 올라 멀리 시내를 바라보며 푸른 꿈을 그리던 기억들이 있다. 주말이면 시내버스를 타고 신리 수원지나 상관 딸기밭으로 몰려다녔고 구이나 금구의 저수지 둑 아래 잔디밭은 야외전축과 함께 낭만 가득한 우리들의 놀이터였다. 특히 같이 공부하던 몇몇 친구들과 가쁜 숨 몰아쉬며 올라갔던 눈 내린 겨울의 모악산은 영원히 잊혀지지 않는 어린 시절의 추억이다.
대학을 다니면서 우리의 놀이터는 시내의 골목 다방이며 막걸리 집으로 바뀌어 진다. 중앙동 우채국 앞 '설다방'이나 음악다방 '돌체'는 해가 떨어지면 하나 둘 씩 모여들던 우리의 아지트였고 홍지서림 근처의 '아리랑제과'는 새콤달콤한 단무지에 우동 맛이 일품인 데이트 장소였다. 고사동 '가본분식'의 자장면 한 그릇은 궁핍한 젊은 연인들의 한 끼를 때우기에 충분하였고, 즉석에서 삶아 건져 올린 모밀국수를 시원한 멸치국물에 적셔 먹는 '서울소바'는 해마다 여름철이면 꼭 한번씩 가야만하는 순례의 코스였다.
골목은 추억의 공간이다. 지금은 퍽이나 좁아 보이는 저 골목길에서 우리는 어린시절 무수히 많은 놀이를 하면서 울고 웃었던 감성의 공간이다. 방울소리 울리며 리어카를 끌고 다니던 두부장수의 모습이 빛바랜 흑백사진으로 오버랩되면서 커다란 무쇄가위 짤랑거리며 골목을 휘젓고 다니는 엿장수의 가윗소리가 귀를 간지럽힌다. 여름철이면 골목마다 ‘아이스께끼‘ 파는 아이들의 메아리에 해가 저물고 우수에 젖은 '찹쌀~떡' 소리와 함께 골목의 겨울밤은 그렇게 깊어 갔다.
골목은 사랑방이다. 골목은 만남의 광장이며 따뜻한 사람 냄새와 정겨운 대화가 피어나는 소통의 공간이다. 충경로 새 길이 나면서 지금은 없어져 버린 중앙동 골목 '정읍집'은 예술을 논하고 시국을 걱정하면서 막걸리잔을 기울이던 ‘야간대학원’이었고 커피향이 그리울 때면 경원동 법원사거리의 '빈센트 반고흐'나 고사동 ‘한일관’ 골목에 있던 '호호(好好)'를 찾아들어 재잘거렸다. 전주극장 뒤의 튀김골목이나 엠티한다고 모여앉아 탕수육에 고량주 시켜먹던 중앙동 '진미반점', 만두맛이 진짜 끝내주는 '일품향', 얼큰한 돼지불고기에 소주잔을 기울이던 '한양불고기' 골목들은 아직도 우리들의 마음을 넉넉하게 해주는 어머니의 품이기도 하다.
골목은 우리시대의 사랑과 지성이 숨쉬는 공간이다. 눈 내리는 날이면 좁다란 골목길을 걸으며 사랑을 나누었고 모차르트와 함께 소박한 행복을 꿈꾸며 찻집에서 키에르 케고르를 읽었다.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이글거리는 우리의 머리는 골목의 술로 달래야만 하였고 젓가락을 두르리며 눈물에 젖은 '아침이슬'을 부르게 하였다. 골목은 이렇게 젊은 청춘들이 노래하고 춤추던 낭만의 공간이었고 절망에 빠진 젊은이들의 타는 가슴을 식혀주었던 지성의 공간이었으며 함께 고민하며 성숙하였던 사색의 공간으로 우리들에게 영원한 마음의 고향이며 추억의 공간이기도 하다.
2009년 7월 최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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