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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소리 향기날리고(전주 한옥마을 수채화 작품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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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편부터: 김인환선생님 구상회군 필자 박정재군
[세번의 만남과 나의 그림 30년]
미술평론가 김인환 선생님. 계간지 '미술세계'를 뒤적이다 ‘미술평론가 김인환’ 이라는 이름을 발견하고 나는 무척이나 궁금해졌다. 내가 아는 홍익공전 김인환 교수님이 바로 이분이 아닐까? 1982년. 기다리던 편지가 왔다. 나의 예측은 맞았다. 홍익공전에 계시면서 미술과 관련된 일을 하셨다는 기억이 있어 혹시나 하는 호기심에, 오랫동안 연락이 두절된 김 교수님의 안부도 궁금하여 편지를 보냈던 것이다.
▉첫번째 만남 - 산 사나이
고등학교 2학년 여름 몇몇 친구들과 함께 지리산 종주를 하던 때였다. 백무동에서 아침 일찍 출발한 우리는 천왕봉을 오른 다음 세석평전과 연하천에서 각각 1박을 한 뒤, 마지막 날은 화엄사까지 가게되었다. 8월의 더위 속에 무거운 배낭을 메고 긴 산행에 지친 나는 하신 길에 일행과 떨어지게 되었다. 내려오는 길은 비교적 단순하여 크게 위험하지는 않았지만 홀로 뒤쳐진 나는 무척 힘든 순간들을 참고 내려와야 했다. 날은 점점 저물어 가고, 천근같은 몸을 이끌며 터벅터벅 걸어 내려오는 나에게 '이걸 좀 마셔 보겠소?'하면서 수통을 내밀며 아저씨 한분이 다가 오셨다. 처음 보는 사람이었지만 인상이 옆집 아저씨처럼 푸근하였고, 수염이 덥수룩한데도 어딘가 정갈하고 절제된 젊음이 풍겨나는 분이었다. 오래 전부터 천천히 나의 뒤를 따라 오신 듯 싶었다. 더 빨리 내려가 편히 쉬고도 싶었을 터이지만 어려움에 처한 어린 학생을 두고 차마 걸음이 떨어지지 않으셨으리라. 여하튼 어둠이 깃든 산길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천천히 함께 내려왔던 그 날의 산행은 아직도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남아 있다. 그 해 우리는 몇 차례 서신을 주고 받으면서 겨울이 되어 눈이 오면 관악산에 오르기로 약속을 하였다. '우리집에 한번 놀러 오오. 아무것도 준비할 것 없소. 아이젠만 하나 들고 오시오'. 그리고 나는 고3이 되었다. 몇 해가 지났을까? 우리는 바쁜 생활 속에서 서로를 잃고 말았다.
천성인지 무엇이든 손으로 하는 일들이 재미있다. 그림을 그린다거나 라디오를 조립한다거나 하는, 손을 움직여 무엇을 만드는 일은 지금도 즐겁다. 고장 난 다리미나 시계를 뜯었다 다시 맞추어 보기도 하고, 무슨 나사든지 눈에 보이면 돌려보고 싶다. 대학에 들어가면서 시간적 여유가 생기자 오랫동안 참아왔던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처음 유화 붓을 잡은 때가 74년 이었으니 벌써 30년이 되었다. 옛 삼남극장 사거리 부근 2층에 있었던 고 손상기 형과 김윤진(현 건양대 미대 교수)이 운영하던 화실을 가게 된 것은 우연치고는 꽤 의미심장한 경험이었다.
윤진이가 그림을 잘 그리는 후배라는 사실은 전부터 알고 있었다. 고등학교를 다니던 어느 날 같은 반 짝이었던 김의진의 집에 놀러 간 일이 있었다. 예수병원 뒷편 고개를 넘어 내려 가다가 오른쪽의 야트막한 야산 언덕배기를 넘어 오르자 넓은 서전주 들녘이 바라보이는 소나무 숲 아래에 살고 있었다. 법학교수이셨던 의진이 아버님께서는 청렴한 성품으로 많은 식구들의 뒷바라지에 넓은 땅이 필요하셨으리라. 강아지가 뒹굴고 노는 마당 한 켠으로 길다란 양계사를 지어 어머님과 함께 닭을 치셨다. 의진이네 집은 식구들이 많아 여러 측면에서 자유분방하였다고 기억된다. 누런 가을 들녘이었는데, 좁은 거실의 복도 끝에 걸린 윤진이(당시 전주고 1학년)의 유화 한점은 무척 인상적이었고, 오랫동안 나를 사로잡았다.
▉두번째 만남 - 미술 평론가
74년.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던 의진이가 내려와 함께 막걸리 잔을 주고 받으면서 자연스레 학창시절의 이야기며 중화산동 집이야기, 동생 윤진이의 그림 이야기들을 하게 되었다. 윤진이는 예상대로 미대에 진학하여 시내에서 손상기 형과 함께 화실을 운영하고 있었다. 특유의 유화 물감 냄새가 아득하게 번지던 화실엔 여기 저기 화구며 캔버스며 이젤들로 가득했고, 어둡고 비좁은 화실은 감수성이 예민하였던 나를 그림의 매력 속으로 빨려들게 했다. 젊은 그림꾼들이 모여 토해 내는 화려한 언어들 속에 파묻혀 이른바 나도 붓을 잡게 되었던 것이다. 주말이면 함께 화구를 메고 쓰러지는 초가를 찾아 시외로 몰려 다니기도 하고, 때로는 배를 그린다며 추운 겨울 군산항구에서 바닷바람을 맞고 덜덜 떨어야 했다. 그때 함께 작업하던 화실 식구들이 이젠 모두 다 중견 작가들이 되었다. 위에 언급한 건양대학교의 김윤진 교수 외에 현 한국미술협회 전주시지부장이신 박상규 화백으로부터 김충순 화백, 김종수 화백, 오우석 화백들이 바로 그들이다. 그 그림 지우들이 오늘까지 나의 작품 활동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대학을 다니는 동안은 주로 '전주 일요화가회'와 '아름미술동호회', 그리고 의과대학 미술동아리에서 그림을 그렸다. 막걸리를 즐겨 마셨던 시절, 시내 중앙동 골목에 '정읍집'이라는 선술집이 있었다. 충경로가 개통되면서 사라진 그 대포집에는 늘 화가며 시인 묵객들, 소위 예술을 한다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특히 그림만큼이나 말씀도 잘 하셨던 하반영 선생님, 인자하신 시골 할아버지 같았던 고 김용봉 선생님, 덥수룩한 수염에 솔직 담백하신 박민평 선생님, 잔잔한 대화로 친화력이 좋았던 유휴열 선생님, 그리고 재담이 좋으셨던 전 전주예총 회장 진동규 시인, 전북문인협회장 소재호 시인, 허장협 변호사님, 홍기율 화백들과 사귀면서 자연스레 ‘일요화가회’에 몸을 담게 되었고, 당시 고등학교를 마치고 홀로 그림을 그리던 나의 오랜 그림 친구인 예원대 강정진 교수나 전북화방 이승갑 사장을 만난 것도 그때 쯤이었다.
일요일이면 가까운 교외로 나가 그림을 그렸다. 원당리, 마자리, 남관, 독배, 동적골 등을 수시로 드나들었고, 그렇게 삼삼오오 모여 앉아 점심을 함께 하던 즐거움은 아직도 소중하고 강렬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 해질 무렵 한 두 점씩 그린 그림을 들고 시내로 돌아오면 예의 그 ‘정읍집’으로 들어가 그 날의 에피소드며 그림 이야기로 밤이 깊은 줄 몰랐다. 그 때 나는 훌륭한 의사가 되고 싶다는 생각보다 진실된 화가가 되기를 더 바랐었다. 사후에 나의 묘비에 글자가 남겨진다면 ‘화가 최인수’로 남고 싶다는 이야기를 자주 하였었다. 아마 청년기의 감성이 그런 호기를 부리게 했겠지만, 솔직히 숨길 수 없을 만큼 그렇게 그림이 좋았었다.
76년. 전북대학교에는 '아름'이라는 미술동아리가 생겨 초창기 멤버로 함께 활동하였다. 공과대학 제도실이나 기숙사 건물 빈방들을 전전하며 그림을 그렸다. 공대 홍대영 교수님께서 배려를 많이 해주셨다. 김인철, 하태봉, 김용우, 김용률 등이 기억에 남는 이름들이다. 특히 김인철은 온다라미술관을 운영하면서 80년대 초 저항적인 민중 예술인들의 후견인으로 많은 활동을 하여 존경스러웠던 친구이기도 하다. '아름미술동호회'는 해마다 전시회도 하면서 최근까지 그 명맥이 이어져 내려오고 있으니 후배들의 정성이 고맙기만 하다.
77년. 의과대학이 경원동에 있을 때이다. 대학 내에서 가장 무서운 선생님 중 한 분이셨던 생리학 조경우 선생님을 찾아 갔다. 예술에 대한 이해도 깊으셨지만 건물 4층 계단실 귀퉁이의 작은방 하나가 욕심이 났기 때문이다. 당시엔 실험용 쥐를 기르고 있었는데 다른 곳에 큰 사육실이 있어 부탁만 잘 드리면 작업실로 비워 주실지 모른다는 기대를 하고 말씀을 드렸더니 고맙게도 선뜻 응해주셨다. 바로 이 방에서 전북의대 미술동아리가 처음 탄생하였다. 작업실은 열었지만 함께 사용할 사람이 없어 상당기간 동안 홀로 사용하였다. 해가 바뀌고 점차 회원이 늘어가면서 우리는 강의실 2-3층 사이의 기다란 복도에 출입문을 막아 빛이 잘 드는 좋은 화실을 꾸몄다. 학생과며 여러 교수님들을 찾아다니며 노력하기도 하였지만 어려운 여건 속에서 공간을 내어준 학교 측의 배려가 무척 고마웠다. 강의 중 빈 시간이 나거나 수업이 끝나면 함께 모여 그림을 그리고 주말엔 다 같이 사생을 나갔다. 학기를 마무리하는 겨울이 되면 우리는 여러 교수님들을 모시고 전시회를 열었다. 이것이 '알레고리'의 전신이다.
82년. ‘미술평론가 김인환’. 그림을 그리면서부터 미술잡지에 자주 눈에 뜨이는 이름이었다. 설마 그 분은 아니겠지. 세상에 김인환이라는 사람이 어디 한두 사람이겠나. 고등학생 시절 산에서 만났던 그분은 홍익공업전문대학 교수이셨다. 혹시나 하고 출판사를 통하여 주소를 수소문하여 편지를 보냈다. 10여년 전 산에서 만났던 그 소년이 이제 대학을 마치고 사회에 나와 일하고 있노라고, 혹시 그 분이시라면 만나고 싶다고, 그리고 나도 그림을 그리고 있다는 다소 호기심 섞인 편지였는데 얼마 후 답장이 날아왔다. 그 기막히고 절묘한 인연에 얼마나 반갑고 놀라웠던가. 그분이 틀림없었다. 그리고는 몇 달 후 유휴열 형과 함께 내가 근무하던 전북대학교 병원에 바람처럼 찾아오시지 않았던가. 전주에 오신 차에 나의 이야기를 나누시다 직접 오신 것이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금새 서로를 알아볼 수 있었다. 아! 김인환 선생님. 10년만의 만남인 셈이다. 전공의 신분으로 병원에 얽매어 있었던 나는 반가움과 놀라움 속에서 차 한잔 대접해 드리지 못하고 그대로 서서 헤어져야만 했다. 그야말로 바람처럼 사라지셨다. 이것이 우리의 짧은 두 번째 만남이었고 그 후 오랫동안 우리는 서로의 視界에서 벗어나 있었다.
▉세번째 만남 - 예술적 동반자
90년대 말. 김세견 화백을 만나면서 나의 그림에는 커다란 변화가 오게 되었다. 투명수채화의 아름다움이 오래 전부터 나의 마음을 움직여 왔던 터에 미술대학 신입생이 된 기분으로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하였다. 몇 달을 스케치북과 연필로 시간을 보내면서 구도와 명암을 새로이 이해하게 되고, 누드 크로키를 통하여 선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되었다. 수채화 작품에 매달리면서 비록 부분적이긴 하지만 미술에 대한 눈을 뜨게 되면서 예술의 현장 속에 미술가들과 함께 동화되고 있다는 데 진실로 기쁘지 않을 수 없었다. 눈을 떠도, 눈을 감아도 나의 생각은 오로지 그림 속으로만 빠져 들어갔다. 모든 사회활동을 중단하고 저녁이면 매일 매일 퀴퀴한 지하의 화실에서 연필과 물감으로 씨름하였다. 아내는 그러한 나를 이해해 주었다. 아침에 출근하면 자정이 되어야 들어오는 나에게 격려를 아끼지 않았던 아내가 너무 고마웠고, 주말이면 소재를 찾아 들과 산으로 기꺼이 동행해 주며 회화의 매력에 눈을 뜨게 해주신 김세견 선생님의 고마움 은 언제까지나 잊을 수 없다. 그 밖에도 미술인으로서 홀로설 수 있도록 힘이 되어주신 이형구 선생님과 어려울 때 서로 의지할 수 있었던 '물빛 수채화‘ 친구들의 도움도 고마웠다.
2002년. 수채화를 통하여 다시 얻은 그림에 대한 나의 열정은 그동안 잊고 지내왔던 30년 전의 그 김인환 선생님을 다시 찾게 하였다. 주소도 전화번호도 잊혀져 연락할 길이 없었던 차에 틈만 나면 여기저기 인터넷에서 그 분을 찾아 헤맸다. 살아만 계신다면 언젠가는 연락이 되리라는 생각이 항상 뇌리에 맴돌았다. 어느 날 아주 우연하게도 '미술평론가협회'라는 곳을 통하여 선생님의 연락처를 알아냈다. 오랫동안 선생님을 잊지 않고 그리워하였던 나의 마음과, 두 번째 만났을 당시 나의 신분적 제약 때문에 제대로 식사 한번 대접해 드리지 못하였던 죄책감, 그리고 최근 나의 그림에 대한 이야기들을 담담히 적어 올렸는데, 뜻밖에 편지는 수취인 불명으로 되돌아 오고 말았다. 그곳에 사시지 않은 모양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얻어 낸 전화번호를 통해 가까운 다른 곳으로 이사를 하셨다는 사실을 알아낼 수 있었다.
우리 둘 사이는 특별한 인척관계도 사제관계도 아니다. 그렇다고 둘 사이에 대단한 사연들이 쌓여 있는 것도 아니지만, 나에게 김인환 선생님은 왠지 보고 싶은 사람으로 항상 머리에 남아 있는 분이다. 우리는 다시 연락을 주고 받을 수 있다는 것이 그저 기쁘기만 하였다. 그 후 어느 날 저녁, 선생님께서는 전주대학교 주영도 교수님의 개인전 참석차 전주에 오셔서 나를 부르셨다. 다른 모든 약속들을 뒤로하고 유휴열 형과 함께 밤 늦게까지 소주잔을 기울이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것이 30년에 걸친 우리의 세 번째 만남이다. 김인환 선생님은 그렇게 그림을 그리는 나에게 또 한분의 소중한 스승이 되어 다가왔다. 어린 시절 뵙게 된 그 ‘산 사나이’는 어느 날 미술평론가로, 미술평론가에서 이제 예술적 동반자로 함께 길을 걷게 되었다.
여기, 떨리는 가슴으로 나의 첫 전시회를 준비하였다. 그림을 그리는 일 자체가 즐겁기는 하지만, 타고난 재주가 워낙 미천하기에 그간의 작품을 바라 보노라면 부족한 부분들만 한눈 가득히 들어와 이내 얼굴이 붉어진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 첫 전시회를 준비한 것은 이제야 비로소 나는 한 사람의 미술인으로 자유스러운 나의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허락받은 듯한 마음가짐에서 지나온 흔적들을 솔직하게 정리하여 고백하고 새로운 나의 길에 안착하길 바라는 스스로의 주문 때문이다. 이제 옷깃을 여미고, 좀 더 겸손한 자세로, 좀 더 진솔하게 나의 그림을 그리고 싶다. 그림이 내 마지막 사는 날까지 결코 놓을 수 없는 나의 열정이자 동반자로 늘 함께 하길 기도한다.
2004년 9월 同心齋에서 如 泉 崔 仁 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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